인사말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교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27년간 중국대륙을 전전하며
파란만장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8.15해방 후 환국하여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정청사입니다.
그리고 환국 후, 이곳에선 역사적인 임정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반탁운동때는 포고령이 선포되는 등 당시
삼천만 겨레의 건국염원이 경교장으로 모아졌으며, 또한 민족의 분단이 거세게 몰아치는 시기에는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 선생이 반역의 무리들에게 총살당한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교장은 그동안 철거, 이전 논란 속에 2001년 4월 반세기 만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다행히 철거의 위기는 넘겼으나, 지금도 여전히 병원으로서 문화재적 보존가치를 살리지 못한 채 이름뿐인 문화재로 전락되어
예전의 국무회의 장소는 원무과로,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암살장소는 의사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헌법전문에는 분명히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임정을 홀대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상해시 정부가 현재의 상해시 소재 옛 임정청사 건물이 고가도로 건설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였을 때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도시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우리의 임정 청사를 현장 보존토록 배려한 정성을 감안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을 비롯한 항일독립지사들의 애국혼이 배어있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요람 경교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2001년 임정환국 56돌을 맞아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첫 사업으로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이란 책을 출간함과 동시에 경교장 원형복원과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범민족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오니 뜻있는 애국동포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2003. 1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경교장복원과 통일민족 공동체의 회복






이윤구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고문
대한적십자사 총재



경교장은 한민족 역사에 우뚝하게 살아남아 있어야 할 거룩한 곳이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국무회의를 주재하셨고 분단된 두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뛰시다가 흉탄에
쓰러지신 집이다.
그 터는 아직 남아 있는 데 집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경교장은 역사의 죽은 무덤 속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갈라진 남녂 땅에 수립된 정부는 줄기차게 국민으로 하여금 경교장을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는
반민족적인 행태를 보여 왔다.
경교장의 복원은 일각을 지체할 수 없는 민족역사의 과제입니다. 반세기가 넘게 저지른 잘못을 아직
백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친숙하게 아는 세대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다시 지어 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20세기의 암담했던 겨레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쳐 줄 거룩하고 위대한 역사 현장 박물관은
후세에는 누가 생각 조차 아니 할 것이다.
백범기념관이 효창공원에 세워진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선생님의 묘소에서 아주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부지가 5500여평, 건물이 1400평이어서 그나마 뜻있는 기념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경교장이 먼저
복원되었어야 한다. 행여 효창공원의 기념관으로 경교장은 이제 잊어도 된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몹시 두렵다.
경교장은 민족의 완전한 독립운동의 영원한 징표이며 겨레공동체의 재통합의 선구자의 숨결을 듣고 따라야 할
우리의 성지다. 한민족이 살아 남아 있는 한 영원무궁토록 생동력이 넘치는 교육의 요람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지금이 정말 이 복원운동의 제일 좋은 때이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처절한 막이 내리고 38선, 휴전선의
철조망이 녹 쓸고 철거되는 대신 경의선과 동해철도, 그리고 금강산과 설악산 영봉을 자유롭게 오가는 새벽이
밝고 있다.
서울과 평양의 정부와 정치인들이 일어나야 한다. 정신계와 교육계, 기업체들과 근로자들 수도권과 영호남과
호서, 영동, 영서, 그리고 관북, 관서의 반도강산 방방곡곡에서 백범 선생을 기리는 새정신운동이 일어나고
경교장의 복원이 얼마나 중차대한 우선 과제인지를 뼈속에서 감지하고 경교장을 소유하고 그 터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지도자들께서 기쁘고 보람찬 마음으로 이 겨레의 거룩한 터와 옛집을 민족 앞에 헌납케 되어야
한다.
이 무거운 마음을 눈물에 섞어 유언하는 것보다 더 처절하고 진솔하게 말하는 심정이나 양심은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백범 선생님께 대한 죄책감과 못 다한 후예의 책임감으로 얼굴을 떨구고 가슴이 천근이나 넘는
짐으로 짓눌리는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선생님의 피를 토하듯 외치시던 육성이 아직 우리 귀에 생생하게 들리고, 우리 기억이 나이 값으로 아주
사라지기 전에 경교장이 다시 복원되는 날을 보고 싶다. 보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003.1

김해 어방동에서

 

 

「비운의 역사현장 아!경교장」책을 내면서



김인수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


2001년 9원 4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백범암살범 안두희가 미육군방첩대(CIC)요원이었음을 미국 문서보관청 문서를 근거로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발표하였다. 이는 암살범 안두희가 92년 생전에 필자에게 증언한 미국 관련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서 백범암살의 실체적 진실과 그 전모를 규명하는데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들끓던 진상규명 여론도 9·11사건과 아프간 전쟁에 파묻혀 또다시 국민이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다.
백범암살!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한 이 비극적인 사건의 진상은 과연 무엇이며 또한 역사에서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시대의 유산으로만 단순히 기억하고 덮어버리고 말 것인가? 진정 대한민국이 자주국가라면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당연히 미국에 공식사과를 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2002년 9월 4일 필자는 조지·W·부시 미국대통령에게 미국정부의 사과와 추가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백악관으로 발송하였으나 지금까지 답변이 없다.

92년 미국무성이 안두희의 미국 관련설을 공식적으로 전면 부인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들의 문서를 통해 밝혀진 진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가? 또한 전통적인 우방이며 혈맹으로 생각하는 대다수 한국민의 뇌리 속에 각인된 미국을 어떻게 인식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이 천인공노할 백범살해사건이 발생한 경교장의 역사적 의미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국내정진대를 미군특수부대(OSS)와 합동으로 국내에 침투시킬 계획으로 맹훈련 중에 갑작스런 8·15해방을 중국 중경에서 맞이하였다. 이후 임정을 해산하고 환국을 하느냐 아니면 임정을 가지고 환국하느냐 수차례의 의정원회의를 통해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환국하여 국민의 총의에 따라 정부를 재조직하기로 결의 하고 환국을 준비하면서 45년 9월 2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하자 즉각 9월 3일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 중국전구 참모장 웨드마이어 미군 중장에게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귀국 후 내지에서 M·P의 보호를 받지 않겠다. 둘째 조선의 치안유지는 우리들의 손으로 하겠다. 셋째 신국가건설에 필요한 군대를 귀국 후 구성하겠다. 넷째 귀국 후의 정치행동에 대하여는 미군정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등의 4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으로 입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임정은 설사 만주를 거쳐 환국을 하더라도 임정간판을 갖고 들어오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환국은 지연되고 결국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마침내 1945년 11월 5일 중경에 동포들의 교민업무를 위해 주중화대표단(단장 박찬익)을 남겨두고 환국 길에 올라 상해에 도착한 후, 11월 23일 파란만장한 27년간의 항일투쟁을 접고 역사적인 환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 임정 요인일행(15명)1진을 맞이하는 사람은 꿈에도 그리던 동포들이 아니라 미군들뿐이었고 환영행사도 없이 미군 장갑차에 실려 오후 5시경 도착한 곳이 서대문의 죽첨장(경교장)이었다.

죽첨장에 도착한 임정요인들은 충무로에 있는 본정호텔(한미호텔)등으로 분산하여 숙소를 정하고 저녁 8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환국성명과 함께 임시정부 당면 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하며 개인자격으로 환국했지만 임시정부의 확고한 견지를 선언하였다.
임정의 환국은 국내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태풍의 눈으로 변하여 일약 경교장은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 되었으며 미군정도 이때에는 임정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12월1일 상해에 머무르던 임정 잔류요인일행 23명이 환국하여 12월3일 오전11시 죽첨장에서는 이승만(임정 구미위원장)도 참석한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후 이곳에서는 수시로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미군정도 사실상 임정의 활동을 묵인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 3상 협정문이 발표되자 12월 28일 임정의 김구 주석이 경교장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운동을 활발히 주도하며 12월 31일엔 임시정부 내무부 포고령(국자1호, 2호)을 선포하고 미군정에 행정권의 이양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은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군정사령관 하지는 임정요인들을 체포하여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까지 세우는 등 임정을 압박하여 엄항섭 선전부장의 파업중지와 직장복귀 방송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이로써 미군정과의 우호적 관계는 사실상 끝나고 임정의 영향력도 상당히 위축되고 말았다.
이후 임정은 1946년 2월 1일에 탄생한 비상국민회의에 여러 정파와 함께 참가하면서 변신하였고, 이어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집행기관이며 군정자문기관으로 탄생한 민주의원에  참여함으로써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활동은 사실상 종료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에서나 사학자들은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으로 환국을 하였기 때문에 마치 중국에서 임정활동이 종료한 것처럼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임정의 공식 종료시점을 공식화 해달라는 요청을 수차례 하였으나 앞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정립하겠다는 답변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전문에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임정의 공식 종료시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도대체 언제 종료된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8·15해방 후 한반도에 미·소 양군이 점령하여 군정이 실시되었으니 임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환국 후 일정기간 활동한 임정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애국선열들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역사를 외세에 의존하는 비자주적인 처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제 36년의 조선총독부 통치도 우리의 역사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경교장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임정은 비록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지만 한국민의 입장에선 정부가 들어온 것이며 실제 이곳에서 국무회의와 임정포고령을 선포하는 등 완전한 자주독립의 의지가 곳곳에 배어있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으로 필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헌법전문에 임정의 법통이 아니라 미군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심각히 고민해 볼 일이다.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경교장 옆에는 서울시가 세워놓은 작은 표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광복 이후 사시다가 서거한 곳」
과연 이 내용이 경교장이 갖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란 말인가?
필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하여 안두희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3년 7개월(1310일)간 기거했던 경교장의 역사적 의미를 대략 3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며 둘째는 최초의 남북협상 산실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셋째는 백범 암살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임정 마지막 청사라는 주장은 임정이 환국한 후 바로 경교장에서 임정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개인자격의 입국이지만 확고한 임정견지를 선언하였으며 최초의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비록 군정 하에서 좌절되었지만 임정포고령을 선포하는 등 1946년 2월 13일까지 4개월(82일)간 청사의 기능을 하였다는 이유이고, 최초의 남북협상 산실이라는 것은 48년 남북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려고 할 때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중심이 되어 옛 임정요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분단을 막고자 온갖 비난과 오해를 무릅쓰며 남북협상을 추진한 곳이었다는 이유이고, 백범 암살 현장이라는 것은 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미국 육군방첩대(CIC)정보요원인 동포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된 비극의 현장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경교장은 일제 때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최창학이 1938년 조선제일의 건축가인 김세연의 설계로 지은 건평 265평의 양식2층(지하1층)건물로서 임시정부환국 환영준비위원회가 운현궁, 동대문 옆의 조선 기와집 등 임정의 숙사로 물색한 곳 중의 하나로 준비위원장인 김석황과 최창학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여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이승만도 임정환국 며칠 전에 경교장을 방문하여 일일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한다.

그리고 원래 이름은 죽첨장이라고 불렸으나 김구 선생이 왜식 이름이라 하여 옛 지명(경교장)을 되살려 경교장으로 바꿔 불렀고 우연한 일이지만 백범 암살범 안두희의 아비 안병서와 최창학은 일제 때 압록강토지개량주식회사라는 사업체를 동업한 일도 있으며 또한 서울 인구가 140만일 당시 김구 선생 장례에 무려 124만 명의 조문객이 문상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서 깊은 경교장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경교장은 백범 서거 후 소유주인 최창학이 유족에게 돌려받은 다음 자유중국 대사관으로, 6·25때는 미군 병원 주둔지로, 9·28수복 후에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이후 월남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8년 고려병원에 인수되어 현재 삼성생명 소유로 강북삼성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무회의장은 원무과로 김구 주석 집무실(암살 장소)은 의사들의 휴게실로 변하였다.

그나마 이러한 경교장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96년 삼성이 이 자리에 17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하려고 하여 철거될 운명에 놓였고 여론의 반대로 이 계획은 잠시 유보되었으나 언제 또다시 철거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필자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경교장복원운동에 나섰으나 현실의 벽이 이토록 높을 줄은 몰랐다. 그해 백범 4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유명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경교장복원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관심을 갖는 곳은 오직 용산 경찰서 정보과가 유일하였고 모두가 외면하였다.

따라서 삼성의 철거를 저지하기 위해 경교장의 문화재 지정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건물이 낡고 변형이 심해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했다는 답변 뿐이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는 국가에 흔쾌히 헌납하기를 요구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이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해 거리에서 시민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하며 경교장에 대해 질문을 해보면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 있는 여관 이름이냐고 오히려 되물을 정도이고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시민들의 어처구니 없는 상식이 대부분이었지 경교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이때 마침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므로 집행위원장인 김덕룡 정무장관에게 경교장을 복원하여 이 곳을 백범기념관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 역시 실현되지 못한 채 김영삼 정부가 끝나가면서 추진위원회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해가 바뀌어 1997년 국회에 경교장복원 및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청원을 국회의원 62명의 서명을 받아 접수하여 해당 상임위에서는 경교장을 현장 답사하여 실태조사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정작 청원심사소위에서는 차일피일 미루며 단 한번의 회의를 소집하지 않은 채 15대 국회의 회기가 종료하였다.

이런 가운데 98년 문화재 지정을 촉구하는 시민한마당 행사를 광화문네거리에서 개최하고 50년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경교장을 방문하여 백범의 집무실이었던 2층 암살현장에서 서거 후 처음으로 조촐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99년에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 왔다. 이번에는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수성)에서 삼성과 협의하여 효창공원에 건립중인 기념관 옆으로 철거, 이전하려고 하여 필자가 각 언론사에 반대성명을 통해 국회에 경교장 건이 청원 접수된 상태에서는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으로 겨우 철거 위기를 넘겼다.

이런 가운데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문화재청에서 1년간의 심의를 거쳐 서울시로 하여금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자, 96년엔 내, 외부의 변형이 심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여 문화재 지정이 불가하다는 서울시가 5년이 지난 2001년에 와서는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그나마 철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한·중 수교 이후 수많은 국민들과 정치인, 대통령들까지 상해의 옛 임정청사를 방문하여 애국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지만 정작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임정 최후의 모습 경교장은 국민 모두가 잊고 산다. 그 이유는 정부와 삼성 때문이다.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 받고 있는 이승만 독재자와 연이은 군사정권들은 경교장을 반세기에 걸쳐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방치하여 왔으며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겨우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으나 현재 안내 간판 하나 없는 이름뿐인 문화재로 전락되어 서울시, 국가보훈처, 심지어 청와대까지 뛰어다녀봤지만 원형, 복원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더욱이 삼성은 경교장이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경교장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 조차 방해를 하였고 실제로 문화재 지정 전까지는 일간지에서 경교장 기사를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간혹 기사가 나도 김구 선생 집무실(암살장소) 내부사진은 실리지 못한다는 취재기자들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삼성은 경교장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문화재 지정 취소 행정소송까지 시도하려고 했다.

경교장은 이미 1949년 김구 선생 장례 후 국보(國寶)로서 영구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한 채 안타깝게 반세기를 넘기고 있으며 비슷하게 백범보다 한 해 먼저 동족의 손에 숨진 인도의 성웅 간디의 숨진 현장을 집에서부터 저격받았던 곳까지 발자국 마다 붉은 샌드스톤으로 이어서 징검다리와 비를 세우고 기념관으로 만들었다는 인도인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런 가운데 각계의 중지를 모아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으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은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이 외압에 시달려 중도 사퇴하는 상황까지 발생하므로 출범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제 경교장은 스스로 일어서는 도리 밖에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국립도서관에서 50년이 넘은 옛 신문들을 복사하여 희미한 글자를 복원하는 등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1년여의 작업 끝에 이 책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8년째 접어든 경교장복원운동이 하루빨리 끝나 구체적인 복원사업이 전개되기를 열망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할 때 내일신문 최영희 발행인이 쓴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마라」는 분노의 칼럼이 문득 떠오르며 아직도 역사 속에 올바로 자리매김이 안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의 영령 앞에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무한한 송구함을 가눌 수 가 없다. 그러므로 기필코 경교장을 복원하여 “임정기념관”으로 명명하여 영구히 자손만대에 물려주어 이 땅의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나마 버림받은 경교장에 관심을 가져준 이들도 많기에 여기까지 왔다. 특히 97년 월간 ‘길’지를 통해 국내 최초로 경교장을 심층 취재 보도하고 이후에도 계속 경교장을 세상에 알려준 고동우 기자(현, 민주노동당 기관지)와 월간 “말” 한국, 한계레, 경향, 대한매일, 문화일보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직도 경교장의 실상에 대해 침묵을 하고 있는 유력지 조선, 중앙, 동아일보에게는 민족의 이름으로 각성을 촉구한다.
끝으로 이 경교장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의 기치를 들고 전력투구 하시다가 억울하게도 반역의 무리들에게 살해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임정의 좌우합작노선에서 조국통일 운동까지 함께 하며 지금은 북녘 땅에 누워계신 김규식 부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엄항섭 선전부장, 김상덕 문화부장, 최동오 법무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등 임정 국무위원들의 영전에 이 책을 올리오니 선열들이시여! 편안히 쉬소서!

 

2003년 1월